Deeper Into Movie/단상

서사와 장면, 그리고 흐름

giantroot2013. 9. 3. 23:53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3시간짜리 영화다. 보통 영화 길이가 2시간 안팎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유레카]의 영화 길이는 이례적으로 길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장면들도 한 사건을 길게 보는 롱테이크가 많으며 대사도 그리 많지 않다. 아오야마 감독이 내한했을 당시 씨네21에서 [유레카]를 왜 그렇게 찍었나, 라고 물어보니 아오야마는 '삶의 노이즈를 찍고 싶어서 그렇게 찍었다.'라고 말했다.

아오야마는 왜 그런 '노이즈'가 낀 긴 서사를 선택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그 이유는 아오야마의 선배이자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같이 사사받았던 동료였던 쿠로사와 키요시가 쓴 '영화 수업'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글에서 '흐름'이 영화와 각본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보고 있다. ("설렁 훌륭한 각본이나 스탭이 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흐름 없이 훌륭한 영화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유레카]는 버스 하이잭이라는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서사와 영화로 담아내기 위해 '삶의 노이즈'가 낀 긴 흐름을 택한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오야마는 그런 느린 흐름이야말로 자신이 극중 캐릭터들이 느끼고 있는 고통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도무지 헤어나올수 없다'라는 감각을 관객들이 느낄수 있도록 서사와 영화의 흐름을 유장하게 구성했다.

이런 아오야마의 길고 느린 흐름이란 선택이 당위성이 있었으며 성공했는가? 나는 충분히 당위성이 있었고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저 위의 사진 속 장면일 것이다. 아오야마는 저 장면을 통해 상처받은 그들이 권태스럽지만 고요히 시간을 보내는 걸 별말없이 보여준다. 혼자도 그렇다고 군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닌, 고요한 게슈탈트-공동체 속에서 서서히 공감하고 치유하는 장면은 이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으며 '상처받은 자들의 대안가족적 관계와 치유'라는 서사에도 어울린다.  

(첨언하자면 이 장면의 흐름과 미장센은 서부극에서 비롯된거기도 하다. 서부극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는 사막과 자연 속에서 카우보이들은 종종 그 속에서 침잠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아오야마는 [유레카]에서 그것을 현대 일본 키타큐슈에 맞게 재구성했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가 가지고 있는 3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과 느린 흐름이 무의미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아오야마는 자신이 왜 그런 '노이즈'가 낀 흐름이 필요한지 차분하게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증명했다. 물론 그 설득과 증명이 모든 관객에게 먹히는건 아니지만-대부분의 관객은 지루하다 여길 가능성이 크다.-그렇다 하더라도 [유레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차분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흐름이 어떻게 관객에게 울림을 안겨주는지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침묵과 느림을 선택했지만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신작 [온리 갓 포기브스]가 무참히 까이는 이유도 어찌보면 감독이 선택한 흐름과 그 이유를 관객에게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걸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신작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드라이브]와 [브론슨]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흐름을 만들어가는지 대충 알고 있다. 일단 두 영화에서 확인해본 결과 윈딩 레픈은 느린 흐름에 퍼지는 핏자국들과 주먹 세례를 사랑하는 감독이다. 

이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다. 적어도 [드라이브]와 [브론슨]에서는 그런 흐름의 선택에 당위성이 있었다. (각각 드라이버의 멜랑콜리한 감수성과 범죄자의 유명해지고 싶다는 심리) 하지만 나는 윈딩 레픈의 그런 선택이 매우 위태하게 느껴졌다. 때때로 그 극단적인 미학의 대비가 서사와 흐름의 당위성을 넘어서 산만하고 난잡하게 흐트러지려고 하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드라이브]에서 엘레베이터에서 '해결사 얼굴을 산산히 으깨버리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윈딩 레픈은 드라이버가 해결사 얼굴이 부수는 장면을 보여준다. (물론 직접적인 폭력은 거의 안 나오고 소리로.) 분명 레픈의 의도는 바로 전에 이어졌던 로맨틱한 키스 씬에 대비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만 놓고 보면 충분히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 폭력은 데이빗 크로넨버그나 박찬욱 영화에 나오는 폭력과 달리 유달리 늘어진다는 느낌도 있다. 비슷한 스타일의 폭력 장면인 크로넨버그의 [동방의 약속]에서 사우나에서 벌어지는 나체 폭력 씬이나 [폭력의 역사]에서 톰이 강도들을 상대하는 장면하고 비교를 해보자. 둘 다 [드라이브]하고 비슷한 잔혹한 신체 손괴/폭력이 등장하지만 크로넨버그는 그 손괴가 가져오는 등장인물들의 끔찍한 육체적 피로감과 감정, 나아가 이런 폭력이 서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당위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드라이브]에는 얼굴 으깨기 폭력은 서사의 당위성이 충족된 이후에도 (서사에서 보자면 드라이버가 해결사 얼굴을 부수면서 아이린이 질겁하는 장면에서 그 당위성이 충족됬을 것이다.) 일부러 느린 템포로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오래 사람 얼굴을 부술수 있어!"라는 관객이 느끼는 '현실성의 임계치'에 도달하기 직전 딱 멈춘다. 마치 이걸 봐달라듯이.

그렇다. 레픈의 영화에 등장하는 느린 흐름과 침묵은 자신이 만들어낸 서사의 흐름이 요구해서라기보다는 관객들이 영화 속에 있는,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과 이미지에 계속 매어두기 위해 일부러 늦춘 것이다. 그의 영화가 종종 영화광의 과시욕으로 넘치는건 당연한 귀결이다. 레픈 영화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가 [드라이브]나 [브론슨]처럼 그래도 뭔가 씹을 건덕지라도 영화 속에 넣어뒀다면 그가 만든 느린 흐름은 어느정도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 씹을 건덕지조차 없는 상황에서 흐름과 이미지만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영화는 재앙이 될 것이다.

[온리 갓 포기브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영화를 보고 리뷰에서 다룰 수 있다면 다루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레픈은 서사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흐름보다는 그런 이미지에만 열광하는 스타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치명적인 문제점이라 생각한다. 

즉슨 우리가 서사를 만들고 그것을 구성하는 장면을 만들때 "그 장면이 가지고 있는 흐름이 서사 전체의 흐름하고 어울리는가? 그럴만한 당위성이 있는가?"를 한번 냉정하게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때도 그 서사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조응하는지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P.S. 게임의 서사 흐름에 대해 간략히 적자면 요새 나오는 AAA급 게임들은 흐름이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다양한 흐름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논지는 기회가 되면 적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