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er Into Movie/단상

그들은 왜 돌아와서 왜 떠나가는가?

giantroot2013. 10. 3. 01:48

[수색자]가 [라스트 오브 어스], [스플린터 셀: 컨빅션], [인간 합격], [유레카]에 드리운 트라우마와 재생의 그림자

존 포드의 [수색자] (1958)는 서부극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영화다. 시대착오적 영웅인 에단 에드워즈가 기나긴 시간에 걸려 코만치 부족에게 납치당한 조카딸을 찾느라 5년동안 수색을 벌인다는 내용의 영화다. 존 포드는 이 영화는 끔찍한 시간과 사건을 넘기 위한 한 영웅의 내외적 투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투쟁으로 인해 그가 얼마나 망가져가고 그가 증오하는 대상과 닮아가는지 보여준다.

[수색자]에서 매력적인 부분이라면 엔딩일 것이다. 트라우마의 시간을 넘어서 가족들과 공동체는 다시 한 곳으로 모인다. 허나 그 트라우마의 시간을 넘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인 영웅은 뒤돌아서 떠나간다.

이 결말 자체는 고전 서부극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비판적인 인식에 기반을 둔 결말이지만 (생각과 다르게 이런 식의 공동체와 개인간의 관계에 대한 시선들은 고전 서부극이라 불리는 존 포드의 [역마차]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수색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 데비와 새로운 공동체로 대표되는 마틴이 주요한 극적 원동력으로 등장하기에 ‘트라우마 치유와 공동체 복원’라는 느낌이 강해진다.

걸작이 그렇듯이 [수색자]는 곧 후배 작품들에 직간접적으로 그림자를 남겼는데 이 글에선 서부극에서 점점 멀어지는 형식으로 그 그림자들을 살펴볼까 한다. 비약이 심하고 누설도 많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1. [라스트 오브 어스] (2013): 맹세할 수 있어요?

사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대놓고 현대/근미래의 서부극을 만드려는 욕망이 담겨있는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그 욕망이 ‘안정적’으로 체화된 케이스라 생각한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고 있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주인공 조엘이 겪었던 트라우마로 시작한다. 조엘의 트라우마는 바로 딸을 잃어야 했던 사건이다. 시간은 건너 뛰어 붕괴된 공동체 속에서 상실에 시달리고 있는 조엘은 만사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던 중 엘리를 만나 어쩌면 옛날 공동체를 되살릴수 있다는 희망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주인공 조엘이 텍사스 출신이라는 점은 [라스트 오브 어스]가 서부극의 영역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 박아두고 있다. 하지만 이 영웅은 서부극의 영토가 아닌 ‘양키’들의 땅인 보스턴에 있다. 왜냐하면 이미 서부는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종종 보이는 폐허에 대한 낭만적인 시선은 서부극 특유의 황무지에 대한 낭만주의를 그대로 가져 온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 이제 황무지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미국 어디에나 있다. 허나 이 낭만은 동시에 절망과 체념도 담겨 있기도 한데, 평범한 서부극과 달리 [라스트 오브 어스]의 황무지는 최소한의 문명마저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선 황무지는 피안이 아닌 하나의 일상이 되버렸다. 조엘과 수많은 사람들이 상실감과 악몽, 우울증, 일탈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허문영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면, “육체적 능력과 물질적 능력이 소진하면 그들에겐 오직 초라한 죽음이 기다릴 것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엔 돌아오는 과정은 떠나는 것과 동일시되어 있지만 조엘과 엘리의 여행이 처음부터 치유로 시작하는건 아니다. 공동체는 이미 붕괴되어 있었고 조엘은 잃어버린 것이 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애써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조엘은 생각한다. 파이어플라이가 시도하려는 구 공동체의 복원에도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연스럽게 냉소와 소통의 부재, 욕이 한동안 둘 사이를 맴돈다.

하지만 자신의 동생 토미가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당연하게도 이 마을은 서부 개척 마을의 그것을 그대로 닮아있다. 심지어 여기서 사람들은 서부극 주인공처럼 말을 타고 다닌다. 당연히 도회적인 파이어플라이하고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엘리는 조엘의 과거를 알게 되고, 자신을 매정하게 내치려는 조엘에 실망해 혼자 떠나려고 한다.

허나 엘리가 도망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조엘은 끝까지 엘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토미의 마을이 보이는 산 등성이에 왔을때 갑자기 조엘은 토미의 마을을 물끄러미 보다가 엘리를 데려가기로 마음먹는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 장면에서 조엘과 엘리가 내심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했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됬다고 생각한다.

이에 토미는 조엘과 엘리가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다면 돌아오라고 말한다. 전에 등장했던 보스턴은 군대가 그들을 쫓고 있고 반겨줄 사람조차 없다. 빌은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못 박으며 피츠버그는 죽은 도시다. 파이어플라이는 한번도 공동체 편입을 제안한 적이 없다. 그러던 중 토미가 처음으로 돌아올 곳을 제안한 것이다. 어쩌면 조엘은 토미에게 ‘돌아와서’ 공동체에 대한 어떤 믿음과 붕괴된 현실을 확인한걸지도 모른다.

조엘과 엘리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콜로라도와 유타로 간다. 어쩌면 이 두 주는 텍사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옛 서부라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수색자의 촬영지도 텍사스와 유타, 콜로라도다. 배경은 텍사스이긴 하지만.) 여기서 [수색자]의 영역인 납치와 수색이 등장한다. 이 수색 과정은 처음엔 수색 대상이 파이어플라이로 시작했다가, 조엘을 치유할 약, 마지막엔 엘리로 변한다.

셋 다 회복의 모티브를 띄고 있다는건 의미심장하다. 우선 파이어플라이는 구 공동체의 회복을 상징하는 존재다. 조엘을 치유할 약은 말할것도 없고, 조엘이 엘리를 찾아나서는 부분은 이전과 다른 절박함이 담겨 있다. 이 절박함은 에단이 데비를 찾아나설때 보였던 집착과 닮아있다. “절대로 그 공동체가 널(데비=엘리) 데려가도록 하지 않겠다!” 나는 조엘의 집착이 [수색자]에서 데비를 백인들의 집으로 데려오는 것에 담겨있는 함의와 같다고 생각했다.

엘리를 데려간 공동체는 인육을 먹는 집단이다. 조엘도 약탈자 (무법자!)생활을 했지만 인육을 먹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걸 보면 이 집단은 [수색자]의 코만치처럼 철저히 타자의 집단으로 설정한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리더인 데이빗은 스카처럼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나온다.

다만 스카가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정상적인 공동체를 이끄는 등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캐릭터였다면 데이빗은 이해할 구석을 보여주는 척하다가 갑자기 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가 이끄는 공동체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심지어 데이빗의 리더십은 스카와 달리 최악으로 묘사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카의 그늘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데이빗에겐 거리를 두게 된다.

새로운 서부극에선 미국 원주민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기에 더욱 극단에 있는 금기를 타자화시켰다고 하면 무리일까? 확실한 것은 그들은 주인공에게 위협적인 타자이며 이를 넘기 위해서 광기어린 행동으로 표출된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데이빗은 엘리에게 머리가 산산조각나 죽는다.

이런 ‘기껏 걸음마를 뗀 공동체가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라는 절박함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솔트레이크 시티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아무말 없이 기린이 사라지는 것을 잠시동안 본다. (이 장면의 경이감은 후술할 [유레카]에 불쑥 등장하는 자연 풍광과 그것을 관조하는 인물들을 담은 컷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서사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캐릭터의 깊은 면과 치유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조엘은 엘리가 떠나지 말고 자신과 영원히 머물길 원한다.

하지만 엘리는 수색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 엘리는 그 수색을 멈추지 않았을까? 엘리가 과거의 문화에 대한 집착을 (엘리는 노래를 좋아하고영화 포스터에 호기심을 보인다.) 보이는걸 생각해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엘리는 새 공동체만큼이나 구 공동체를 복구하고 싶어한다.

허나 조엘은 그렇지 않다. 작중에선 설명이 없지만, 나는 조엘이 구 공동체를 완벽하게 복구될리가 없으며 복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릴것이라는걸 알아차렸던 거 아닌가 생각한다. 엘리를 맡기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엘리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신이치로가 한 “난 그렇게 오래 못 기다려. 그렇게 오래 못 살 거야.” 대사가 떠오른다. 불행히도 어른에겐 시간은 얼마 없다.

그렇게 그들은 최종 목표인 마를렌과 파이어플라이를 향해 간다. 허나 그 곳엔 충격적인 진실이 있었다. 엘리의 뇌 자체를 드러내야 백신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즉슨 구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해선, 새 공동체의 붕괴를 담보해야 한다. 당연히 새 공동체와 치유의 꿈을 꾸던 조엘은 거부하고 파이어플라이를 모두 물리치고 엘리를 들고 나가려고 한다. 이 과정의 연출을 보면 조엘의 이성이 거의 마비되어, 새 공동체에 대한 희망에 빠져버렸다는게 보인다. 구 공동체와 새 공동체의 공존이 불가능해졌을때 조엘은 과감히 후자를 택한 것이다.

이때 마를렌이 등장한다. 그녀는 조엘에게 구 공동체의 가치를 역설하며 그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게임은 장면을 일시적으로 자르고 운전하는 조엘을 보여주면서 그 결과를 ‘유보’한다. 플레이어가 새 공동체는 영영 불가능하는 것인가, 라는 불안감에 잡혀 있으면 뒷좌석에서 깨어나는 엘리가 보이고 조엘의 선택도 그와 동시에 나온다.

[라스트 오브 어스]의 무서움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엘리에게 조엘은 거짓말을 한다. ‘파이어플라이는 너와 같은 항체를 가진 사람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그 놈들은 치료를 포기했다.’ 하지만 반대로 조엘은 구 공동체-파이어플라이를 완벽하게 파괴해버렸다. 엘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토미의 마을에 들어서면서 조엘과 엘리는 서로의 개인사를 털어놓는다. 그때 엘리는 갑자기 아까 말했던거 사실이라고 약속하라고 말한다. 조엘은 잠시 멈칫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엘리가 받아들이며 게임은 막을 내린다.

이를 보듯이 [라스트 오브 어스] 결말엔 유보라는게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한다. 조엘의 선택이 뭐였는지 바로 보여주지 않는 것, 조엘의 거짓말에 엘리가 대답하지 않는것, 조엘이 사실이였다는 말을 할때 잠시 멈칫하는것. 나는 이 유보야말로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좋은 부분이라 생각하는데 이 유보가 새로 세워진 공동체에 대한 의문 제기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어쩌면 토미와 데이빗의 등장으로 결말의 ‘선택’은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토미는 새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데이빗은 그에 대조되는 에너지를 줬다. 구 공동체 없이도 새 공동체 토미의 마을이 와이오밍 주에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이 되었던 주답게 여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서부극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옛 서부가 황폐해진 이상 새로운 서부 이상향으로 와이오밍 주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명멸하는 반딧불firefly 대신 전기가 항상 들어오는 수력발전소가 있는 와이오밍 주 마을 말이다.

하지만 유보를 통해 드러났듯이 조엘과 엘리의 공동체는 여전히 불안하다. 우선 이 공동체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환영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엘이 엘리에게 딸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 그렇다. 어쩌면 조엘은 엘리를 사라의 환생라 보고 있는거 아닐까? 그가 사라의 환영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은 예로 사라가 선물한 고장난 시계다.

하지만 엘리가 이야기하는 트라우마는 가족과 상관없는 (엘리는 고아다.), 죽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다가 그들은 결국 조엘의 동생인 토미가 세운 공동체로 편입되는데 이것 역시 결국 군대 체제인 파이어플라이와 다른, 가족과 혈연으로 대표되는 구 공동체 아닌가? 환영과 집착, 혈연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공동체는 과연 지속될수 있을까?

2. [스플린터 셀: 컨빅션] (2010): 재미있군. 자네가 충성을 말하다니.

불안을 남긴채 [수색자]의 흔적이 느껴지는 또다른 공동체 복구극을 보자. 톰 클랜시의 [스플린터 셀]은 서드 에셜론에 소속된 스파이 샘 피셔를 다루고 있는 게임이다. 재미있게도 이 시리즈는 더블 에이전트와 에센셜즈, 컨빅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작가진들은 서부극의 구조를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블 에이전트에서 샘은 자기 실수로 부하를 잃고 딸 역시 죽은 후 서드 에셜론을 그만둔다. 결국 고통스럽게 현장으로 복귀하지만 마지막엔 자기 친우를 죽이고 서드 에셜론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사실 [스플린터 셀]의 샘 피셔가 서부극의 총잡이, 그것도 보안관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말 대신 비행기와 지프를 타고 세계라는 사막을 떠돌아다니며 각지에서 일어나는 ‘시스템’을 붕괴시키려는 악의를 혼자서 싸우며 해결한다. 초기 3부작에서 그의 동료들은 통신이나 기지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날 뿐이다. 세계라는 황야에서 동료는 스쳐지나갈 뿐이며 적만이 나타날 뿐이다.

초기 삼부작에선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래도 공동체는 여전히 굳건했고 영웅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더블 에이전트에 이르면 영웅이 속한 공동체의 수장-대장과 죽음을 맞이하고 영웅의 소중한 사람도 죽는다. 악한 자들이 그 공동체를 차지해버렸고 영웅은 집으로 돌아가는게 아닌 황무지의 방황을 선택한다.

[스플린터 셀 컨빅션]에 이르면 샘은 유머감각을 잃고 폭력적으로 적을 대하는데, 이는 [수색자]에서 [더티 해리]로 이어지는 거침없는 심판자인 서부 사나이를 체현하고 있다.

컨빅션이 재미있는게, 떠남과 이동, 도착이라는 묘사가 전작에 비해 상당히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전작들이 전개에 필요한거 아니라면 이동이 등장하지 않고 뿅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걸 생각해보면 독특하다 할 수 있는데, 이 여정의 묘사 때문에 게임은 전반적으로 로드무비 나아가 서부극의 어법과 닮아간다.

따라서 컨빅션이 [수색자]와 비슷하게 여정과 수색의 과정으로 채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샘은 여기서 에단이 그랬듯이 악당들을 윽박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며 그 수색을 이어진다. 전작 샘이 느물거리는 유머를 지니며 여유를 잃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건데, 이는 자신과 공동체를 트라우마의 시간으로 내몰은 자들에게 대한 분노나 다름없다. 마치 에단이 코만치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표출했던 것처럼. 에단이나 샘이 잃어버린 것이 약한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나 후반부에 샘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사실 자신이 서드 에셜론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딸의 존재조차 이용하려는 내부 스파이 때문에 램버트가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죽은 척했다는 것을. 이 사실을 알았을때 샘은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감정이 섞여 있으면서도 애써 냉정하게 폭력을 통제해왔던 폭력 전문가가 처음으로 상궤에서 벗어난,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마구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 분노엔 조금이나마 믿었던 공동체에 대한 배반감, 그렇게 믿었던 의사 아버지들 (램버트와 리드)이 사실은 자신에게 매몰된 트라우마의 시간을 도래하게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고 사실 그 더럽혀진 공동체가 사실상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자괴감이 섞여 있다. 조엘이 그랬듯이 수색의 끝에 도달한 진실은 그동안의 자신의 인식을 재고해야 할 정도로 경악스러웠던 것이다.

게임의 전개가 빅터의 ‘증언’으로 구성되어있는건 그 점에서 흥미롭다. 자신을 심문하면서 영상을 녹화하는 적 앞에서 빅터는 마치 샘이 죽은 것처럼 말을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증언하는 장면은 안나가 샘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나온 직후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의 장면까지 도달하기 전까지 샘의 생사를 확신할 수 없다. (당연히 죽었을리가 없다는건 다들 짐작할 것이다. 유비소프트가 밥줄을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않는가.)

이런 도입부 때문에 해당 파트가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빅터가 어느 시간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끝난 후? 헬기 추락한 뒤? 아니면 워싱턴 DC에서 헤어진 후?) 나아가 게임 속에 계속 등장하는 샘은 산 자의 회고 속에 등장하는 망자처럼 보인다. 거기다 캠코더 프레임 속에서 이뤄지는 연출은 영상 매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인 ‘애도’와 ‘기억의 재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왜 빅터는 굳이 ‘죽었다’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듯이 빅터는 미국이 샘이 죽였다고 말한다. 이 말엔 빌리 더 키드 같은 자유로운 서부의 사나이를 죽인 (부패한 메기도의 손에 놀아난 미국과 서드 에셜론이라는) 자들에 대한 힐난과 동시에 애도를 담고 있다. 지극히 미국적인 애도인것이다. 잠시간의 애도가 끝나고 빅터는 그 과정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작중에서 갑작스러운 과거사 파트의 등장도 이런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다. 스셀 컨빅션의 이야기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회고이므로 그와 얽힌 사소한 추억들도 반드시 등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회고엔 자신이 만들고 지켜낸 두 공동체 (가족과 국가/단체)에 대한 망자의 헌신이 녹아 있다. 이런 점은 [수색자]보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지키고 했던 하나의 공동체는 전혀 깨끗하지 않으며 외려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는게 만천하에 드러난다. 남은 것은 자신이 그 공동체의 붕괴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낸 샘이 함께 하자는 안나의 제안을 뿌리치고 “재미있군. 자네가 충성을 말하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영웅이 돌아와 확인한 트라우마의 근원은 바로 자기 자신이나 다름없었고 영웅은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은채 다시 떠날 수 밖에 없다.

이런 모든 회고를 끝낸 빅터는 마지막 대사를 읇는다.

“지금 샘은 사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어.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더군. 남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샘은 그걸 가족이라고 봤지. 그리고 샘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돌아왔어. 샘이 사라와 함께 떠나기 전에 나한테 한 말이 뭔지 아나? 빅터, 모든게 고맙네. 전부 자네 덕분이네. 난 자네를 친형제처럼 사랑하네 라고 했지. 친형제… 그것은 가족이지? 그렇지 않나?”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이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영웅이 떠나 그렇게 도달한 곳은 바로 딸과 “친형제처럼 사랑하는” 빅터인 것이다. 즉슨 공동체의 재생을 확인하고 떠난 에단과 달리 샘은 공동체의 붕괴를 확인하고 새로운 재생을 하기 위해 황무지로 떠난 것이다.

[블랙리스트] 프리퀄 만화 [에코스]에서는 이런 재생과정이 다뤄져 있다. 샘은 여전히 사라를 다시 잃을까 악몽을 꿀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으며, 사라는 자신은 이미 어른이고 괜찮다고 안심시킨 뒤 그를 떠난다. 그리고 샘은 비를 맞으며 집, 나아가 빅터에게 돌아간다. 빅터는 여전히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러나 서사 산업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과 트라우마를 원한다. [블랙리스트]에선 그 빅터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고 사라가 속해있는 공동체마저 붕괴할 위기에 처한다. 샘은 분노하며 새로운 미션에 뛰어든다.

하지만 나는 종종 [블랙리스트]가 사상적으로나 캐릭터 작법으로나 전작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리스트]의 샘은 트라우마의 시간을 겪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줬던 공동체의 일부처럼 보인다. 옛 친구를 쏘고 냉담하고 씁쓸하게 한마디 던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렇지 않게 다섯번째 자유란 이름으로 국방장관과 무수한 타자들을 죽이고 또 악당을 죽은것처럼 처리한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빅터와 사라를 걱정하는 모습은 기만처럼 다가온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블록버스터 액션 게임의 쾌락이라는 명목으로 이런 대의를 위한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은 것일까? 트라우마의 시간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두 일본 영화를 통해 전개하고자 한다.

3. [인간합격] (1999): 뭘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되찾을 수 있을거 아니에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간합격]은 서부극이라던지 거기서 영감을 받은 활극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수색자]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요시이 유타카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사고를 당한 후 10년만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지만 가족은 해체된 상태다. 그는 그 가족을 복구하고자 한다.

사실 공동체의 해체와 이를 복구하려는 노력은 굳이 서부극을 빌려오지 않아도 흔하디 흔한 소재다. 하지만 유달리 [인간합격]과 [수색자] 나아가 서부극 사이엔 기이할 정도로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유타카가 회복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 그렇다. 아버지가 남긴 ‘조랑말 목장’을 만들어 가족들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하필 목장, 그것도 서부극의 아이콘 중 하나인 조랑말일까?

물론 이에 대한 서사적인 당위성은 있다. 작중에서 조랑말은 유타카의 어린아이지만 어른으로 대접받는 상황은 표현하는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어째서 유타카와 조랑말이 되어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기요시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느 정도 [수색자] (비약이 심하다면 서부극의 관습이라 한정짓겠다.) 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심지어 대사에서도 그 그림자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집으로 데려와야지” “무슨 집? 코만치들한테 습격당해서 다 타버린 집으로?” / “아무래도 집에 가야 될 것 같은데” “안가는게 낫지 않을까?”) 여기에 언급된 작품들이 그렇듯이 [인간합격]도 붕괴된 상태를 원래대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기요시는 이런 시도를 하려는 유타카를 어린아이로 묘사한다. 옷입는 것부터 시작해 (20대 중반인 그는 마치 10대 소년처럼 안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 떼쓰는 장면, 유치한 행동을 시작해 심지어 여동생의 입을 빌어 ‘철없는 아이’라고 완벽하게 못 박는다. 이런 유타카의 모습은 [수색자]의 시대착오적이고 때론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에단의 모습과 많이 겹친다. 어른은 폭압적이고 아이는 순진무구하다.

심지어 기요시는 에단에 대척되는 적대자인 스카 (데비를 납치한 코만치)도 데려온다. 교통사고 가해자였던 무로타가 그렇다. “난 자네 인생을 망쳤어! 자넨 날 망치고! 샘샘이야. 이젠 같아졌다고!” 라고 저주하는 무로타의 대사는 스카의 “백인이 내 두 아들을 죽였다. 그래서 난 백인들의… (카메라는 백인들의 전리품을 보여준다)” 대사하고 겹친다.

스카와 데이빗이 소녀를 납치하는 것으로 주인공의 공동체를 부정한다면 무로타는 유타카의 목장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는 형식으로 주인공의 공동체를 부정한다. 단지 스카는 퇴장할때까지 끝까지 타자로 남는다면 무로타의 분노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잃어버린것은 유타카 뿐만이 아니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와 방법이 있던 [수색자]의 에단과 달리, [인간합격]의 유타카에겐 목표와 방법이 없다. ‘데비’와 ‘사라’라는 트라우마와 그 대상이 분명히 있었던 [수색자]나 [스플린터 셀: 컨빅션]와 달리 [인간합격]의 요시이 가족들은 자신들의 붕괴를 트라우마라 생각하지 않고 (한 인물은 심지어 “운명이 다했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런 운명적인 힘으로 붕괴를 설명하는 부분은 [유레카]에서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심지어 그 회복의 기회마저 거부한다. [수색자]와 [인간합격]이 갈리는 지점이라면 이 부분일 것이다.

그 결과 ‘수색’의 과정과 결과도 달라진다. 우선 유타카는 조엘처럼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자각을 못하는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에단과 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무엇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한 질문이 유타카에게는 중요하게 대두된다. 목적이 있는 폭력과 대화, 충돌이 이어지는 [수색자]나 [스플린터 셀: 컨빅션], [라스트 오브 어스]의 수색 과정과 달리, [인간합격]의 수색 과정은 침잠, 느닷없는 폭력과 엉뚱하고 순진무구한 행동들의 연속이다.

사실 공동체의 파괴도 그렇다. 극이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일어난 스카의 파괴가 트라우마의 시발점이 되는 것과 달리 무로타의 파괴는 이미 극이 시작하기 전에 일어났으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괴 역시 사실 실제적인 파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파국을 재확인하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가깝다. 그렇기에 결말도 달라질수 밖에 없다. 공동체의 복구를 확인한 후 집을 ‘떠나는’ 에단이나 집으로 돌아온 샘과 조엘과 달리 유타카는 홀로 남아 집을 지키다가 자살같은 죽음을 선택한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것은 두 영화에서 신화가 서사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차이라고 보는게 타당할듯 하다. [수색자]에서는 신화는 희미해질언정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단이 없더라도 젊은 영웅인 마틴이 그 공동체 신화를 이어갈 것이다. [스플린터 셀: 컨빅션]나 [라스트 오브 어스]에선 신화까진 아니더라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간합격]의 신화같은 “가족 공동체”는 종언을 고했으며 그 복원은 절대로 이뤄질수 없다. 심지어 젊은 영웅였던 유타카 역시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붕괴한다. 붕괴한 신화의 파편 속에서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영웅에게 남은건 죽음 뿐이다.

결말은 그래서 씁쓸하면서도 따스하다. 유타카의 신화같은 소망은 끝내 살아 생전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죽고 나서 가족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다시 흩어지는 가족들. (마치 황지우의 ‘여정’처럼. ‘(전략) 통통배로/직행버스로/고속버스로/택시로/혹은 비행기로/모두들 일이 밀렸다고, 목포로, 광주로, 부산으로, 혹은 서울로, 혹은 엘에이로’) 유타카가 살아있었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였던 후지모리가 짐을 뒤적이다 유타카가 받았던 엽서를 발견한다. 유타카의 유사 아버지였던 후지모리가 그의 존재를 증언해준다는 게 인상깊다. 공동체 복원을 꿈꿨던 우화극의 영웅은 그렇게 사라지고 유사 가족의 일원만이 그를 추모한다.

영화에서 유타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애매하게 대답하는 후지모리에게 유타카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난 가능하다고 봐. 물론 물건이라면 원상태로 돌아올 수 없지만.” 후지모리의 애도는 곧 부서진 공동체의 회복을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영웅에 대한 애도인 것이다. 하지만 샘과 달리 유타카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회복을 이뤄냈기 때문에 더욱 애잔하다.

4. [유레카] (2000):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

20세기의 영웅의 죽음을 증언한 후지모리는 그렇게 21세기 되어 생판 모르던 남의 양아버지가 된다.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에선 이 문제가 더욱 교묘하고 철저하게 배치된다. 키타큐슈 어느 소도시에 버스 하이잭 사건이 일어나고 세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마코토 ([인간합격]의 후지모리 역을 맡았던 야쿠쇼 코지가 맡았다)와 남매인 나오키와 코즈에. 마코토는 사라지고 나오키와 코즈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 2년이 지난후 마코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이 세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언급한 작품들 중에서 [유레카]는 [수색자]의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는 영화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직접적으로 존 포드와 [수색자]에게 오마쥬를 바쳤다. 아니나 다를까 아오야마 감독은 주인공들을 서부극 캐릭터들처럼 다룬다. 마코토가 돌아오는 장면의 미장센과 그의 차림새는 마치 서부극의 영웅이 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점에서 [유레카]는 언급한 작품 중 [수색자]의 그림자를 가장 짙게 드리운 현대극일것이다.

그러나 [유레카]는 [수색자]보다는 [인간합격]에 가까운 영화다. 아니 [인간합격]의 트라우마 제공자는 이름이라도 있었다. [유레카]에서 주인공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범인은 익명의 존재로 끝내 남아 사살되버린다. 심지어 이 범인의 동기는 지극히 추상적으로 남기 때문에 뭐라 원망할수도 대답할 수도 없다.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잃어버렸는지도 알기가 힘들다.

[유레카]에 이르면 트라우마로 붕괴된 공동체는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해진다. 마코토의 아내 는 이혼을 청하면서 “당신과 나는 아마 운명이 아니였던것 같다.”라고 슬프게 읇조린다. 나오키 남매의 엄마는 남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병으로 죽는다. 사와이네 가족은 마코토에게 힘이 되주지 못한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레카]엔 복구할만한 가족은 없으며 복구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시간에 살아남은 자들은 애써 그걸 실현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도 치유를 위한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한 시간이 흐르고 묵묵히 서로에게 의지할 곳이되준다. (별 상관없어보였던 아키히코조차, 사실은 그만의 트라우마의 시간-[헬프리스]-이 있었다는게 나중에 드러난다. 그 역시 공동체에 편입되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 구축 시도는 또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마코토는 살인범으로 오해받는다. 마코토는 전형적인 오해받는 무법자다. 마코토가 범죄를 저질렀다던가 그런건 아니지만 친족들에게도 살인범으로 오해받고, 형사에게 “당신이 정말 싫다.”라는 말을 들으며 감옥에 가두는 걸 보면 그와 그가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는 트라우마의 시간을 겪지 못한 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 부분에서 마코토에게 또다른 고민이 제시된다. 전 부인 유미코에게 던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대사는 나온 이후부터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을 엮는 중요한 문장이 된다.

에단, 샘, 조엘, 유타카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에단과 샘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조엘은 아닌 척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유타카는 깨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미친듯이 매달렸다.

하지만 마코토는 자식도 없고 아내도 떠나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부모가 보호하고 치유하기엔 마코토는 너무 커버렸다. 의무감으로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코즈에와 나오키는 본질적으로 타자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마코토는 유미코는 비록 내겐 불가능했지만 당신이라면 분명 그게 가능할거라고 대답한다. 난 유미코의 이 말이 마코토를 해메지 않게 한 결정적인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버린다. 바로 [수색자]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마코토는 타무라 남매와 남매의 사촌인 아키히코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여정에 오른다. 떠나기 직전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그를 의심하고 싫어했던 형사가 “당신 돌아올 거지?”라고 묻는다. 마코토의 대답은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다.

마코토의 이 대사는 돌아올 곳이 있었던 에단과 샘, 조엘, 돌아올 곳을 만들고자 했던 유타카하고 대조된다. 돌아올 곳은 지금 여기엔 없고, 생길리도 없다. [유레카]의 트라우마의 시간은 인물들에게 도저히 끊을수 없는 가혹한 운명과 굴레가 되버렸다. 고아의식이 마침내 영혼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황무지로 떠나는 것이다. 에단과 무수한 선후배 카우보이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아오야마는 [수색자]와 달리 떠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새로운 여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바로 트라우마의 시작인 장소다. 그들은 거기서 시작해 황량한 자연과 다양한 곳들을 떠돈다. 허문영 평론가가 지적했던 것처럼 “황무지는 불친절하지만 세상과 달리 그들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기에 그들이 필요한 침묵의 시간을 안겨준다. [유레카]는 그 침묵의 시간을 완벽하게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런 치유 과정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자가 있다. 나오키가 그렇다. 더 이상 자기에게 주워진 가혹한 굴레를 못 이기고 광기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오키에게 연인을 잃은 마코토는 그러나, 나오키를 버리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에겐 다른 치유법이 필요하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마코토는 나오키의 죄를 직시하도록 하고 그가 죽지 말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떠나보낸다.

그렇게 나오키를 떠나보낸 일행들. 냉소적인 아키히코는 마코토에게 그냥 거기에 머무는게 나오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묻는다. 이에 마코토는 아키히코를 내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뭐가 ‘행복하겠지’,라는거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고! 나오키가 어디론가 가버렸더라도 언젠가 잃어버린 걸 되찾으러 다시 돌아온다구!!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너 같은 인간들은 아무것도 아닐테니! 나는 말이지, 그 애를 보호하는 걸로 내 삶을 살아갈꺼니까!”

이 대사만큼이나 마코토 자신이 던졌던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와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처절한 대답도 없을 것이다. 마코토는 이 지난한 여정을 통해 결국엔 돌아올 곳이 없더라도, 머나먼 곳에 떠나왔더라도, 우리는 어디론가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약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그런 곳을 만들어줘야 하는게 자신과 같은 어른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레카]는 [망념의 잠드]하고 겹치고 있는데 자세한 것은 다른 글에서 다루겠다.)

이 대사를 말할 때 마코토의 말투가 언급했던 스셀 컨빅션의 빅터가 샘을 회고하는 투하고 비슷하다는 것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허문영 평론가를 다시 인용하자면 “빌리 더 키드를 추모하는 팻 개릿의 어조”) 하지만 빅터의 어조가 자유로웠던 영웅을 죽인 자들을 비난하며 기다리는 쪽에 가깝다면 마코토의 어조는 상처받은 영혼을 쉽사리 매도하는 걸 비난하며 그를 언제까지 기다리겠다는 영웅의 선언에 가깝다.

이 떠남이 끝나고 마코토의 타인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은 마침내 코즈에를 통해 꽃피운다. 실어증에 빠지고 나오키와 아키히코마저 떠나보낸 코즈에는 마지막 바다와 산에서 자신의 언어와 색깔을 찾고 트라우마의 시간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들은 에단과 데비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간’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집을 보여주지 않고 갑자기 조감 샷으로 그들이 가지 않은 들판들과 산을 보여준다. 아까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해요?’라는 대사와 엮어 생각해보면 이는 기존 체제의 편입이 아닌게 분명하다. 오히려 자기들만의 운명과 있을 곳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로 보는게 타당할듯 싶다. 이 점에서 마코토는 결국 기존 공동체에 편입됬던 샘과 조엘이라던지, 개척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유타카하고는 다르다.

그 점에서 [유레카] 역시 공동체에 대한 어떤 간절한 소망이 간절히 담겨 있으면서도 위의 작품들과 다른 혈연과 국가를 뛰어넘는 타자들 간의 수평적이고 비혈연적인 연대를 꿈꾸고 있다.

이상 [수색자]에 빚진 현대극들이 어떻게 트라우마와 재생을 상상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네 작품엔 공동체 (특히 가족)와 붕괴, 그리고 재생이 중요한 원동력으로 자리잡는다. 어떤 이는 쉽게 그것을 이뤄내고 어떤 이는 실패하고 어떤 이는 긴 시간 끝에 찾아낸다. 과연 이들이 꿈꿨던 공동체는 어떻게 그 이야기를 이어갈것인가? 이 부족한 글로는 그저 애매한 예측만 할 뿐이다.

P.S.1 글 작성 도중 톰 클랜시의 부고를 들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P.S.2 이 글은 허문영 평론가의 새드 배케이션 비평 “수평적이며 비혈연적인 유대의 힘”에서 영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