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phone Music/잡담

Plastics - Copy

giantroot2010. 5. 14. 00:55



일본 음악은 이래저래 파고들면 좀 비범한 구석이 있습니다. 물론 영미권 음악의 벤치마킹이라는 느낌이 강한지라, 영미권보다는 당연히 포스가 떨어지지만 영미권이 아닌 문화권, 그 중 동양권에서 어떻게 서구권 음악을 받아들이고 재해석했는지 좋은 견본이 될 만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높으신 분들의 센스조차 없어서 그런 해택조차 받지도 못했죠.

일본 음악의 위엄은 전자 음악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크라프트베르크를 당대에 벌써 긍정한 유일한 동양권 국가 (제가 동남아 쪽은 무지해서 모르겠네요.)인데, 그 꼭지점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호소노 하루오미와 타카하시 히로유키, 사카모토 류이치는 엄청난 것을 이뤄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제가 YMO CD를 사고 난 뒤 간략히...) 

YMO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한 전자 음악 밴드들에 물꼬를 터줬는데 P-MODEL, 히카슈, 일풍당, 전기 그루브 더 나아가 미래의 켄 이시이까지 일본의 전자 음악 뮤지션들은 YMO가 깔아놓은 고속도로를 질주했습니다. 플라스틱스 역시 그 해택을 입은 뮤지션입니다.

패션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이너 등 음악과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1976년 결성된 플라스틱스는 후일 일본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설인 요닌바야시 멤버인 사쿠마 마사히데가 (앨범이 절판되어 각잡고 듣진 못했으나 유튜브에서 들은 一触即発는 엄청나더라고요.) 베이스 주자로 가입하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악기를 처음 다뤄보는' 사람들다운 단순함이 두드려져 보이는 밴드입니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에서 출발한 P-MODEL이나 처음부터 상당한 경력의 프로 뮤지션들의 집합체였던 YMO, 결성 이전부터 이런저런 음악적 활동이나 전위 예술에 손을 대온 히카슈하고는 차별되죠. 한마디로 보다 펑크적입니다.

물론 이들이 들려주는 펑크는 정통 펑크가 아닌 팝화된 뉴웨이브에 가깝습니다. 크라프트베르크를 주축으로 삼고, 1집 시절 토킹 헤즈의 똘끼넘치는 펑크 팝과 장난기 넘치면서 히스테릭한 보컬, 블론디의 단순한 뉴웨이브-디스코 리듬 등 다양한 뉴웨이브의 이름들과 요소들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지만, 그 중 데보와 B-52's의 영향력이 가장 커 보입니다. 특히 데보의 병신같지만 멋있는 밴드 이미지와 토킹 헤즈보다 좀 더 신시사이저 친화적인 편곡과 연주, 기술 문명에 대한 가사는 플라스틱스 멤버들이 많이 참조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각설하고, 폴리식스를 좋아하면서 이 밴드를 모르고 지나가는 것은 메기솔 1,2,3편을 안하고 피스 워커를 하는 거나이건 무리한 비유인가, 식좀을 하지 않고 디펜스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라 사료됩니다. 사실 저 역시 폴리식스를 경유해 이 밴드를 알게 됬지만, 들으면서 폴리식스의 혁신이 어느날 뚝 떨어진게 아닌거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폴리식스 멤버들이 깎듯이 경의를 표하는 밴드이기도 하고요.

그들의 대표작이라면 역시 첫 앨범 [Welcome Plastic]일텐데, 당 앨범 수록곡인 이 곡 Copy는 단순하고도 쌈빡한 일렉트로닉 팝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트랙입니다. 탄탄한 베이스 리듬 세션, 단순하지만 확실한 뼈대와 휠이 있는 기타 연주, 독특한 로파이 신시사이저가 들을수록 감칠맛 나는군요. 경박하게 오도방정 떨면서도 절대로 과하지 않게, 적절히 통제된 광기는 이들의 센스가 시대를 뛰어넘었다는 걸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비록 YMO나 P-MODEL처럼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유명해지지 않아서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언제나 그랬듯 좋은 음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P.S.되도록 정식 CD로 구하기 전에는 MP3로 다 받아듣지 말자는 입장이지만, 이 앨범은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재발매 됬긴 했는데, 단품 중고가가 9000엔이나 합니다. 그렇다고 리마스터링도 안 된 베스트 1CD 살 노릇도 못 되고, 일본 아이튠즈 결제는 막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