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피에르 멜빌은 이전까지 없는 길을 만들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멜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고 존 카사베티스가 그랬듯이 개인 스튜디오를 차렸다. 멜빌은 장편 데뷔작으로 베르코르 (본명 장 브륄레)의 소설 [바다의 침묵]을 점찍었다. 멜빌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도중, 런던 공습 아래에서 마음을 빼앗겼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가 그랬듯이 조합에 소속되지 않았던 멜빌이 판권과 영화 제작 권리를 얻는건 힘든 일이었다. 결국 긴 투쟁 끝에 베르코르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영화화하는데 허락했다. 그 조건은 바로 24명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투표를 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말이 결정이었지, 24명 중 1명이라도 반대했다면 감독 멜빌은 다른 데뷔작을 들고와야 할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난 시기인데다 멜빌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이니 이 조건을 거부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멜빌의 데뷔작은 어렵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프닝은 그 점에서 갓 장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짜 감독 멜빌의 조심스러움과 끝나버린 한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바다의 침묵] 도입부는 단순히 액자식 구조라 하기 힘들다. 멜빌은 책을 주고받는 과정을 익명화된 얼굴과 은밀한 행동, 장식 없는 하얀 표지의 책이라는 이미지로 일종의 범죄 거래처럼 묘사한 뒤, 책을 펼치면서 관객을 이야기로 인도한다. 이 이상한 오프닝은 어딘가 간절하다. 이후 대두될 범죄 장르적 묘사는 차치하더라도, 이 은밀한 행동과 이미지들은 억압되어 있다. 멜빌은 마치 얼마전까지 있었던 비시 프랑스 시절의 생활 양태가 어땠는지 잊지 않으려는 듯이 도입부를 시작한다. 이런 뉘앙스가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사족같이 보일지 몰라도, 멜빌은 [바다의 침묵]을 만들면서 자신이 겪었던 역사의 비극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하면서 시작한다.
이 억압은 [바다의 침묵]의 기이한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 나치 군대가 주둔하고, 나치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낙은 한 노인과 노인의 질녀가 머물고 있는 집에 하숙하게 된다. 프랑스를 좋아하는 베르너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노인과 노인의 질녀에게 말을 건다. 그 주제는 베르너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매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베르너는 두 사람이 있는 거실로 찾아와 말을 걸고 베르너의 대화 시도는 독백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침묵은 그 점에서 복잡한 함의를 갖는다. 침묵은 매우 수동적인 저항이다. 침묵은 사람을 죽일수도, 바꿀수도 없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강제된 상황을 거부할수는 있다.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살고 싶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베르너는 그걸 알고 있다. 그가 계속 말을 걸러 오는 이유도, 그 침묵을 깨고 나치 독일로써 프랑스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도다. 베르코르는 그 긴장 관계를 서술 방식을 통해 구축한다. 원작 소설은 노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노인은 주변을 관찰하거나 최소한의 행동만 할뿐 끝나기 직전까지 베르너한테 말을 걸지 않기에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내 질녀와 진주인공 베르너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버린다. 베르코르는 침묵을 이용해 시점을 교묘하게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소설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서술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레이션을 이용할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원작의 문장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시각적인 매체이기에 보이지 않는 나레이션은 보이는 이미지에게 밀려나기 마련이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간의 충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멜빌은 끊임없이 시선을 맞추려는 베르너와 노력과 아예 베르너에게 등진 두 사람을 프레임에 배치하면서 침묵의 권력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대사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클로즈업를 배치하면서 침묵하는 얼굴의 부동성을 강조한다. 무수한 클로즈업은 베르너의 유창한 대사에 대항해 베르너의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떤 지점에서 [바다의 침묵]은 정기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날마다 인물들은 위치가 배정받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원작과 영화 모두 권력을 쥐고 있는 베르너를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술을 담당하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사실 '침묵'외는 다른 부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끔 베르너가 등장하지 않을때, 얘기를 나누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무거운 침묵 자체가 캐릭터화된 것처럼 보인다. 자연히 우리는 서술의 대상이 되는 베르너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베르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살짝 도취된듯 하면서 교양과 인류애, 잔혹한 현실 간의 괴리에 좌절감을 느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질녀는 베르너의 입체적인 모습에 망국의 치욕과 성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로 옮겨지면서 이 경향은 더 심화된다. 전반적으로 멜빌의 카메라는 노인과 노인의 질녀보다는 베르너를 따라다니는데 더 관심이 많아보인다. 영화 [바다의 침묵]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베르너가 파리로 가는 시퀀스에 있다. 이 시퀀스 도입부에서 노인과 노인의 질녀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파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는 베르너의 클로즈업과 파리의 화려함이 교차편집된다. 개선문과 역사적인 동상들을 올려다 보면서 기웃기웃거리는 베르너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로 프랑스 문화에 존경을 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베르너는 진심으로 나치 장교로써 권위와 이웃 국가 간의 교류라는 상반된 요소의 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시퀀스에서 멜빌은 전쟁이 막 끝난 파리에 서서 나치 시점에서 파리는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민한다.
[바다의 침묵]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베르너가 침묵의 클로즈업이 어떤 뜻인지 이해하는 순간에 있다. 장교 클럽 시퀀스는 그 점에서 노인의 집 시퀀스를 뒤집어놓으면서 각성을 유도케한다. 베르너는 나치즘으로 찌든 동생과 장교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베르너를 둘러싼 나치 장교들은 베르너를 조롱하며 아리아 우월주의와 파시즘의 파괴 욕구를 외친다. 같은 장소와 같은 샷, 같은 행동과 대사의 반복과 변주에서 벗어났을때 베르너는 자신이 얼마나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이상주의자며 자신을 향한 노인 가족의 '바다의 침묵'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굴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멜빌은 실내극을 통풍시키면서 역사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무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인물은 자신들의 역할이 실로 하찮지만 폭력적인 걸 깨닫는다. 멜빌의 침묵의 클로즈업은 그 점에서 베르코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하찮지만 폭압적인 족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의 집으로 돌아온 베르너는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자신에게 주워진 위치를 알아버린 베르너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동부 전선으로 가기로 한다. 안락한 후방에서 허위와 기만에 갇혀 있기 보다는 실제로 행동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동부 전선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들에게 베르너의 선택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베르너는 다른 나치과 달리 순수하지만 열성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믿고 회의하고 말을 걸었지만 노인과 노인의 질녀처럼 역사가 만들어버린 무대의 굴레를 부수지 못한다. 선함을 믿을수록 죽음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운명.
그 어찌할수 없는 엄숙한 비극의 순간에서 베르너는 드디어 침묵의 클로즈업과 대화하게 된다. "안녕히 가세요." 노인 역시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불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 두마디만큼 처절하게 가슴을 찢는 대사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다소 단조로울수도 있는 젊은 감독의 연출을 불멸의 순간으로 만드는 것도 침묵의 클로즈업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통해 영화는 역사의 폭력을 이해하고 끊을 단초를 제공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막 끝난 역사의 비극과 얘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고, 거기서 영원히 남을 자신의 영화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르코르는 그 의도를 이해하고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했다. [바다의 침묵]은 가장 멜빌답거나 가장 완숙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간절한 멜빌의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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